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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 없어도 은행 오는 게 신나” 지점 폐쇄 대신 100평 규모 ‘고령층 문화공간’ 만든 하나은행
하나은행 광주지점 시니어 공간 ‘라운지1968’ 가보니
영화·음악감상실에 모임 공간, 서재까지 무료로 이용
지역 노인들 위한 공간 설계…금융·생활교육도 진행
영업점 폐쇄 멈춘 하나은행…유휴공간 활용 계속된다
광주 동구 금남로 하나은행 광주지점 라운지1968 강의실에서 방문객들이 금융·생활교육을 듣고 있다. 김광우 기자.

[헤럴드경제(광주)=김광우 기자] “노인네, 농담도 참 밸시럽네”

광주시 구도심에 위치한 한 은행에 들어서자 익숙한 창구들 대신 곳곳에 위치한 책 전시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넓은 공간에는 널찍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언뜻 도서관으로 오해할 법한 풍경이었다. 그 뒤로 10평 남짓 강의실에는 무언가에 집중한 노인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일제히 스마트폰을 쥔 채 화면 속 자신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동그란 버튼을 눌러 볼까요” 앞에 선 직원의 한마디에 ‘찰칵’ 소리가 잇따랐다. “인자 죽어야 쓰겄네” 사진을 본 한 노인의 장난섞인 탄식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광주시 동구 전일빌딩 하나은행 광주지점 1층에는 은행 창구가 없다. 대신 지역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독서 시설(서재), 모임 공간, 영화감상실, 음악감상실 등이 마련돼 있다. 강의실에서는 2주에 한 번 고령층(시니어)을 대상으로 한 금융 및 생활교육이 실시된다. 보이스피싱 예방 등 금융 관련 수업이 끝난 뒤에는 곧바로 ‘스마트폰 활용’ 등 생활교육이 이루어진다. 이날은 ‘카메라 촬영과 사진’을 주제로 강의가 진행됐다.

“고객 아니어도 괜찮아” 음악·영화감상실에 무료 교육까지

광주 동구 금남로 하나은행 광주지점 라운지1968 서재 모습. 김광우 기자.

지난 2020년 7월 하나은행은 광주지점 이전과 함께 1층 100평 남짓의 공간을 ‘시니어 전용 복합문화체험공간’으로 조성했다. 고령화에 따라 지역 노인 인구는 점차 늘어나는 반면, 편하게 이용할 공간은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 따라서다. 전일빌딩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헬기 사격의 탄흔이 있는 곳이다. 이에 하나은행은 전일빌딩 준공년도인 1968년을 모티브로 해 ‘라운지1968’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같은 건물에 입점한 하나은행과 하나증권 영업점은 각각 2층과 3층에 위치했다. 이에 방문객들이 영업점을 거치지 않고도 공동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아울러 은행 업무를 보러 온 고객들도 1층 로비에 들어선 순간 자연스레 공간을 접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하나은행 채널전략부 관계자는 “70~80년대 향수를 공유하는 지역 시니어들이 부담 없이 제2의 인생을 누릴 수 있도록 공간 및 프로그램을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광주 동구 금남로 하나은행 광주지점 라운지1968 영화감상실에서 방문객들이 영화를 보고 있다. 김광우 기자.

별도의 교육 프로그램이 없는 날에도 시설을 활용하는 손님들은 끊이지 않는다. 지역기관에서 기증한 책을 포함해 총 800여권의 책이 소장된 서재에서는 주로 노인들이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한다. 중장년을 대상으로 한 책 큐레이션도 주기적으로 이루어진다. LP 플레이어 등이 구비된 음악감상실에서는 70~80년대 음악을 듣고자 하는 방문객들로 붐빈다.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영화감상실도 인기다. 여타 시설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로비에서 추위나 더위를 피하며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약 2년째 라운지1968을 찾고 있다는 김명순(68) 씨는 “오늘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라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을까’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방문했다”면서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인 데다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들까지 만날 수 있다 보니, 은행 업무와는 별개로 자주 찾게 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광주 동구 금남로 하나은행 광주지점 ATM기기 화면. 김광우 기자.

애초 시니어들을 위해 설계된 공간인 만큼, 이들을 배려한 요소들도 눈에 띈다. 우선 광주지점 1층 ATM은 노인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큰 글씨 안내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라운지 내 곳곳에는 고령층이 취약한 금융사기 방지 안내문 등도 마련돼 있다. 이곳에 상주하는 직원들은 공간을 처음 찾는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부지런히 시설과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이날 처음 라운지1968을 찾았다는 박모(68) 씨는 “영화감상실, 음악감상실 등 공간을 쓸 수 있는 데다, 친절한 직원들이 교육까지 제공하니 ‘파라다이스’같다”면서 “기회가 된다면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방문해야겠다”고 말했다.

과감히 ‘수익’ 포기한 하나은행…“고객 접점 확대도 중장기적 성장”

광주 동구 금남로 하나은행 광주지점 라운지1968 방문객들이 세미나실을 대관해 이용하고 있다. 김광우 기자.

주목할 점은 라운지1968을 통한 수익성 사업이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은행 채널전략부 관계자는 “공간 조성 목적은 오로지 지역 시니어들의 ‘관계 맺기’”라고 강조했다. 여타 공간대여 또한 무료다. 그렇다고 해서 방문객을 상대로 한 상품 소개 등 간접 영업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고객이 아닌 방문객들도 편하게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부담을 느낄 수 있는 요소를 배제했다는 게 하나은행 측의 설명이다.

개점 초기에는 은행 VIP들을 대상으로 한 공간이 아니냐는 식의 오해도 많았다. 은행서 무료로 문화 공간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낯선 사례기 때문이다. 라운지1968 관리를 총괄하고 있는 송혜영 하나은행 팀장은 “초기에는 하나은행에 얼마를 써야 공간을 활용할 수 있냐는 식의 문의가 많았던 게 사실”이라며 “거래가 없어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데만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고 설명했다.

공간 조성 이후 약 4년이 흐른 지금, 라운지1968은 이미 주변 노인들에게 ‘문화 사랑방’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나은행에 따르면 한 달에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수는 평균 300~400명에 이른다. 폭염이 지속되는 여름철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린다. 공간에 애정을 가진 이용객들이 직접 문화 프로그램을 주도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시민 주도의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자리 잡은 셈이다.

광주 동구 금남로 하나은행 광주지점 라운지1968 로비 모습. 김광우 기자.

실제 라운지1968을 즐겨 찾던 한 고객은 지난 2021년 ‘풀꽃’ 나태주 시인 강연 주최를 시작으로 김용택 시인, 주철환 PD 등 연사를 하나은행 광주지점에 초청해 시민 대상 행사를 열었다. 지난해 개최된 김용택 시인 초청행사에는 시민 5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 팀장은 “여러 주체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공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관계를 맺고, 또 하나의 문화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하나은행이 지점 유휴공간 활용에 나서는 것은, 여타 은행들이 영업점을 지속적으로 축소하는 현상과 반대되는 모습이다. 실제 하나은행은 지난해 7월 이후 영업점 폐쇄를 잠정 중단한 상태다. 되레 3분기에만 영업점 3곳, 4분기에는 영업점 1곳을 추가 개설했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하나은행의 총영업점 수는 지난해 말 기준 597개로 1년 새 4곳이 늘어났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무리하게 점포를 축소하는 것보다,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단계라는 시각도 있다”면서 “하나은행 컬처뱅크와 같이 지점 유휴공간을 활용해 지역 커뮤니티를 조성하고 고객과의 접점을 넓히는 것 또한 중장기적 시각에서의 성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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