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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월성 지을 때 제물로 바쳐진 시신은 50대 두 남성
독극물, 두부손상 등 ‘제물용 살인’ 흔적은 未발견
인신공희 산채 묻힌건지,사후매장인지 확인 안돼
만리장성예로는 이미 죽은 시신 인신공양 가능성
증거는 없어…산 사람 묻은 순장과 비슷할 공산 커
최근 조사 의례도로 발견…城은 배합재료로 탄탄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고대 사회 지도층 사람이 죽으면 평민이 함께 묻히는 순장제도는 인권 면에서 가장 악명높은 풍습이었다.

물론 순장 당하는 평민이나 노예의 유족에겐 많은 보상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심청전의 심청도 풍어를 기원할 목적의 산 제물이었는데, 만약 연꽃에 타고 귀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엄청난 건축물을 올릴 때 사람을 공사현장에 묻는 인신공희(人身供犧)가 지난 2017년 경주 월성 서성벽 문지(門址)확인 작업때 국내 처음 확인돼 현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인신공희 또는 인주 설화는 사람을 기둥으로 세우거나 주춧돌 아래에 묻으면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2017년 발굴 때엔 문지의 소실 만을 확인한채 작업을 중지했고, 인신공희 유골의 특성과 유골을 깔고 올려진 성벽이 어떻게 축조되었는지 자세히 확인되지 않았다.

서성벽 확장조사 전경. 캡션 박스안 인신공희 인골 출토지점.

2017년 당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재물로 바쳐진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 중 한 구는 키 166㎝로 똑바로 누웠고, 키 159㎝의 다른 한구는 반대쪽 인골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얼굴과 한쪽 팔이 약간 돌려져 있는 모습으로 묻혀 있었다. 키 큰 유골은 남자이고 키가 작은 유골은 성별이 가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두 구 모두 얼굴 주변에서 나무껍질(수피)가 부분적으로 확인됐고, 축조된 성벽 토층 안에 의도적으로 주검을 넣은 정황이 뚜렷하다고 밝힌 바 있다. 1500년 전 것으로 추정했다.

문화재청은 월성에 대한 최근 1년여 간의 추가발굴 결과를 27일 랜선 발표하면서 인신공희된 시신은 50대 남성들이라고 밝혔다. 살아있는 사람을 살해해 묻었다면, 독극물, 두부손상 등 징후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징후는 없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인신공희였어도, 제발 사망한 시신을 바쳤기를 바라는 현대인의 마음은 모두 같다. 당시 50대 라면 남성들의 한계수명과 비슷하다. 만리장성 축조 당시, 공사 중 사망한 백성을 성벽 축조때 현장에 바쳤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월성에서의 인신공희도 이미 사망해 있던 시신을 넣었기를 바래보지만, 과학은 아니다. 이미 죽은 시신을 인신공희했다는 증거도 없다.

월성 축조 이후 시점의 인신공희 의심 사례는 9세기 남북국(신라-발해)시대 신라 우물 속에서는 어린 아이의 유골이 소, 말, 개 등의 뼈, 부서뜨린 제기들과 함께 발견된 것과 월성 해자, 김제 벽골제 저수지 발굴 인골 등이다. 산 사람을 매장하는 순장의 흔적은 10대 소녀가 희생양이 된 창녕 송현동과 가야문화권 고령 지산동 등 여럿 있다.

점선 박스 부분이 2019년 이후 올해까지 추가 조사한 구간. 제의 도로는 붉은색 가로 표시로 이 도로 수직으로는 첨성대-황남동-계림-월성 연결도로가 교차한다. 인신공희 유골이 발견된 지점은 서쪽 서성벽이다.

이종훈 소장이 지휘하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팀은 지난해 9월 이후 발굴성과를 밝히면서, 계림을 지나 월성으로 올라가는 통행로 유구를 발견했는데 폭 5m 이하의 소형 도로로 추정되며, 국가적 제사, 제의 공간과 관련된 계림, 황남동 대형건물지 유적과 통하고 있어 왕궁 영역을 내부적으로 연결하는 도로망에 대한 자료로서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도로 유구는 또 1호 석축 해자가 1-1호 석축 해자와 1-2호 석축 해자로 구분되는 양상이 파악되어 앞으로 해자 복원정비 공사에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줄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인신공희가 있었던 서성벽 발굴조사는 성 내부로 들어가는 문지 확인을 위해 시행되었지만 이미 유실된 상태였고, 인근 범위에서 50대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성벽 기저부 조성층과 체성부(성의 몸체) 성토층 사이에서 확인됐다. 아울러 인신공희와 성벽 축조 공정의 연결성을 확인하였으며, 볏짚을 포함한 각종 유기물질, 목탄 등을 섞어 흙을 교대로 깔았던, 탄탄한 교호성토(交互盛土)의 흔적, 흙덩어리를 재료로 쌓은 흔적, 체성부 내부에 존재한 석렬이 확인되었다고 연구팀을 밝혔다.

월성내 북서편 건물지

아울러 월성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통일신라~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존재한 유구의 통시적 변화를 확인해 볼 수 있었으며 서성벽 일부 구간 보완 조사를 통해 신라의 초기 토성에 시행되었던 다양한 축조 공법과 제의 흔적을 폭넓게 분석해 볼 기회가 마련됐고, 앞으로 서성벽 축조 공정과 연계된 고환경 시료 분석과 유물의 전수 조사를 기반으로 베일에 싸여 있는 월성의 축조 연대도 밝혀질 것이라 기대된다고 부연했다.

남천 물과 북쪽 박스형 해자 6개 이상으로 둘러 쌓인 월성은 초승달 모양으로 넓이 11만㎡이다. 현재 경복궁 넓이(일제가 파괴하기전엔 지금의 배 가까이 더 넓었음)의 1/3 가량이다. 초기 신라의 궁성은 크지 않았다. 국력도 경북 동북부, 경남 등에 독자세력(가야, 실직국, 조문국 등)이 있었기 때문에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나라가 커지면서 동쪽 해자 건너편에 동궁과 월지를 두고 북서쪽 발천 일대에 통치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첨성대 등을 지어 궁성의 위세를 확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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