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스포츠 만화경] 주세혁의 시계패션
뉴스| 2019-08-22 05:39
이미지중앙

2016년 리우 올림픽 때 주세혁의 모습. 자세히 보면 왼손에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 이 손목시계야말로 '웃픈 수비탁구'의 상징이다.


# 2003년 주세혁의 파리 세계탁구선수권 준우승은 지금까지도 두 가지 큰 의미로 남아 있다. 첫 번째는 한국 남자탁구가 세계선수권 남자단식에서 기록한 최고 성적이고, 두 번째는 현대탁구에서 수비전형의 선수(이하 수비수)가 기록한 최고 성적이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세 번째 소소한 의미도 있다. 바로 손목시계 패션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탁구선수들은 시계를 차고 플레이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예민한 운동인 까닭에 경기는 물론, 연습할 때도 손목시계를 차지 않았다. 그런데 오른손잡이인 주세혁은 왼손에 손목시계를 찬 채 당시 세계 최강이던 마린(중국), ‘백핸드 괴물’ 크레앙가(그리스) 등을 연파하며 결승까지 올랐다. 묘기에 가까운 주세혁의 플레이가 화제가 되면서, 이후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시계를 차고 경기에 나서는 것이 유행이 되기도 했다.

# 그런데 이 주세혁의 시계착용에는 나름 ‘웃픈’ 사연이 있다. 파워드라이브가 위력을 떨치는 남자탁구에서 수비수는 솔직히 찬밥이다. 축구에서 다들 처음에는 골을 넣는 공격수를 선호하지만 이게 안 되면 수비선수로 밀리고, 야구도 처음엔 가장 화려한 투수를 선호하다가 유격수, 외야수 등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초등학교 때 탁구재능이 좀 딸리지만 탁구를 포기하라고 할 수 없는 선수에게 코치들이 수비전형을 권한다. 한 팀에 한 명 정도는 수비수가 있어야 다른 선수의 드라이브 연습 때 도움이 되고, 또 대회 때 상대 수비수에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탁구능력이 좀 떨어지니 수비를 택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초등학교 때 수비전형이 된 주세혁은 ‘불리한 전형’에도 나름 호성적을 냈다. 하지만 ‘수비탁구로는 세계 정상에 도전할 수 없다’는 인식이 워낙 강했던 까닭에 처음에는 대표팀에서도 중용되지 않았다. 태릉선수촌에 들어가도 주로 여자선수들의 드라이브 연습 파트너를 많이 했다. “내 연습도 아니고, 다른 선배(주로 여자)들의 볼을 받아주는 것이니 지루했죠. 주어진 시간만 하고 빨리 끝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때 연습장에는 시계가 없었어요. 그래서 손목시계를 차고 연습을 하던 것이 습관이 됐죠. 뭐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게 자연스러워서 2003년 세계선수권 등 경기 때도 시계를 차고 나간 겁니다.”

이미지중앙

지난 19일 육상효 영화감독이 무주 경기장에서 주세혁 선수를 가까이서 지켜본 후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


# 지난 18일 탁구동호인이기도 한 육상효 영화감독(인하대교수)은 무주를 직접 찾아 제35회 대통령기 전국시도탁구대회를 ‘직관’했다. 그리고 우연히 주세혁의 경기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감동을 받았다. “이건 탁구를 넘어 묘기야!” 그날 저녁 식사자리에서 주세혁에게 “왜 수비형을 선택했느냐?”고 질문을 던졌고, 앞서 언급한 ‘연습파트너 수비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국문과 출신인 육 감독은 이런 내용을 잘 정리해 주세혁의 뒷모습 사진과 함께 SNS에 글을 올렸다.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삶에도 공격형이 있고, 수비형이 있다. 수비는 선택하는 게 아니라 공격을 막다보면 만들어진다. 타인을 공격해서 이기는 것이 아닌, 그 공격을 끝까지 막아내서 이기는 것도 당당하고 아름답다.’

# 22일 끝나는 대통령기 대회에서 불혹의 주세혁(1980년생)과, 그가 이끄는 신생팀 마사회가 연일 화제다. 예선부터 전승(6승)을 기록하며 결승에 올라 22일 또 다른 ‘언더독’이었던 보람할렐루야와 우승을 놓고 다툰다. 어느 팀이 우승하든 창단 후 첫 우승이다. 2018년을 삼성생명 여자팀의 코치로 보낸 후 올해 마사회의 창단멤버로 현역복귀한 주세혁은 이번 대회에서 개인적으로는5경기를 뛰어 4승1패를 기록했다. 같은 수비수인 수자원공사의 최덕화에게만 0-3으로 졌을 뿐 다른 공격수 4명을 모두 꺾었다. 이중 2-2 상황에서 마지막 5단식 주자로 나가 이긴 것이 두 번이나 된다. 절친한 후배인 유승민 IOC위원이 대한탁구협회장으로 당선되면서, 미래발전위원장을 맡는 등 운동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보람할렐루야의 오광헌 감독은 “솔직히, 주세혁 선수가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

# 주세혁 경기는 인기가 많다. 많은 탁구대가 놓이는 대회장에서 주세혁이 뛰면 그쪽으로 발길과 시선이 쏠린다. 한 팬은 주세혁의 플레이를 보다가 “뭐야 나도 모르게 마사회를 응원하고 있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주세혁은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아 7년 연속으로 중국슈퍼리그에서 뛰기도 했다. 유투브에 주세혁(한글이나 영문)을 치며 수많은 동영상이 나온다. 이미 복귀전이었던 7월 실업챔피언전의 주세혁 영상 몇 개가 올라왔는데, 이제 ‘무주것’도 추가될 것이다. 탁구팬들에게는 흘러간 영상이 아니라, 생생한 현역 주세혁의 플레이를 계속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생겼다. 요즘도 주세혁은 손목시계를 찰까?눈여겨 보지 않았기에 직접 물었더니 “찼다가 안 찼다가 합니다”라는 답이 나왔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이미지중앙

지난 19일 열린 개회식에서 주세혁이 남자선수 대표로 선수를 하고 있는 장면. 사실상의 최고령 선수인 까닭에 본인도 쑥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월간탁구/더핑퐁]


sports@heraldcorp.com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