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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칼럼] 무명임을 한탄하지 마라
뉴스| 2019-08-22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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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한 더그 배런. [사진=PGA투어 챔피언스]


프레드 커플스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드라이빙 레인지로 나서는 참이었다. 그는 최종 라운드를 먼저 끝내고 클럽 하우스에서 마지막 조 경기를 TV로 보던 중이었다. 백전노장 커플스는 이날 무려 아홉 타를 줄였다. 데일리 베스트로 조금 전까지 ‘클럽 하우스 공동 선두’였다. 아직 모든 선수가 경기를 끝내지는 않은 상황에서 그 때까지 공동 선두로 경기를 마쳤다는 말이다.

마스터즈를 포함해 PGA투어에서 15승, 그리고 PGA 투어 챔피언스에서 13승을 올린 쉰아홉 살 커플스. 그런 그도 오랜만에 우승 기회가 오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경쟁자는 17번과 18번 두 홀을 남긴 상황에서 커플스보다 한 타 앞서 나갔다. 15번 홀에서 먼 거리 퍼트를 떨어뜨린 것이다. 이어 원온(한 번에 그린에 올리는 것)이 가능한 16번홀 짧은 파4에서는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깔끔한 드라이버 티샷으로 프린지까지 볼을 보내 놓고도 어프러치를 실수해 파로 마친 것이다.

경쟁자가 두 타 차로 달아나는데 실패하자 커플스도 은근히 희망을 품었다. 17번홀은 쉽지 않은 파3 홀. 아차 하면 보기를 할 수도 있었다.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커플스가 몇 번이고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든 선수는 바로 ‘더그 배런(Doug Barron)’이었다.

1992년 프로 골퍼가 됐지만 단 1승도 올리지 못한 선수였다. PGA 투어는 물론이고 콘 페리 투어(PGA 2부 투어의 새 이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PGA 투어 시절에는 시드를 꾸준히 유지하지도 못했다. 번번히 시드를 잃고 큐스쿨을 다시 치렀다. 심지어 최근 7년간은 2부 투어 풀 시드도 얻지 못해 간간히 예선을 치르고서야 나가곤 했을 정도다.

그랬다. 더그 배런은 철저히 ‘이름 없는’ 선수였다. 그런 그가 만 쉰 살에 PGA 투어 챔피언스에 얼굴을 내민 것은 불과 몇 주 전이다. 이번 대회도 시드가 있어 나온 것도 아니었다. 먼데이(월요일에 열리는 예선)를 통과해 출전했다. 그런 배런이 첫날 ‘꽁지머리’ 미구엘 앙헬 히메네스와 공동 선두로 경기를 마칠 때만 해도 뱁새 김용준 프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골프 대회 해설을 맡고 나서 이름 없는 선수가 하루 반짝 성적을 내고 이튿날 리더 보드에서 사라지는 일을 이미 몇 번이나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그 배런은 조금 달랐다. 이틀째도 선두로 마쳤다. 이틀째 중반 그는 대회 첫 보기를 기록하더니 갑자기 아이언 샷이 흔들렸다. 뱁새 김 프로는 ‘역시 우승 경험이 없으니 멘탈이 흔들리는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을까? 딱 그 시점에 경기위원회가 낙뢰 탓에 경기를 중단했다. 당시 공동 선두 히메네스는 아이언 샷이 막 살아나는 상황이었다. 낙뢰는 폭우로 이어지더니 해가 질 때까지 경기를 재개하지 못했다. 배런은 마지막 날 잔여 경기를 치르고 나서 최종 라운드에 나섰다.

놀랍게도 그는 잔여 경기 때 타수를 줄였다. 전날 흔들리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배런과 챔피언 조에서 최종 라운드를 치른 선수는 스콧 매캐런과 스콧 파렐. 각각 현재 PGA 투어 챔피언스 상금 랭킹 1위와 4위인 강자들이었다. 이 둘 틈에서 배런은 주눅이 든 모습이라곤 없었다.

그의 드라이버 티 샷은 번번히 페어웨이를 지켰다. 커플스와 공동 선두가 된 것을 12번 홀 리더 보드에서 본 뒤로 두차례 버디 퍼팅이 살짝 빗나갔다. 뱁새는 ‘저러다 무너지는 것 아닌가’하고 괜한 걱정을 했다. 그런데 그 뒤 제법 먼 거리 퍼팅을 홀에 떨구더니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들 보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확신을 더하는 제스처였다.

그렇게 맞은 승부처 17번홀. 200야드 남짓한 긴 파3 홀에서 그는 시원스럽게 아이언을 휘둘렀다. 볼은 한 번 튀고 조금 구르더니 홀에 네 댓 발짝 떨어진 곳에 멈췄다. 이어진 퍼팅 스트로크가 아주 부드러웠다고 생각하는 순간 볼이 홀로 떨어졌다. 버디. 2위 커플스와 두 타 차 선두가 된 것이다. 마지막 홀 티샷은 조금 잡아당겼다. 그러나 볼은 깊지 않은 러프에 떨어졌다. 커플스가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철수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것도 같은 시간이었다. 승부가 난 것이다.

마지막 홀을 파로 마친 배런은 우승을 거머쥐었다. 지난 주에 끝난 ‘2019 PGA 투어 챔피언스 딕스 스포팅 굿즈’ 대회다. 배런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다가 뱁새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가 두 번째 대회만에 첫 우승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50세 25일’로 PGA 투어 챔피언스 최연소 우승 기록을 갈아치웠기 때문도 아니었다. 175cm와 77kg으로 다른 시니어 투어 멤버보다 전혀 우월하지 않은 신체 조건을 딛고 우승을 일궈낸 것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27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1승도 없이 버텨 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는 직전 대회인 ‘2019 PGA 투어 더 시니어 오픈’ 때도 예선을 치르고 참가했다. 마지막 날 65타를 치며 공동 5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만 해도 뱁새는 ‘운이 따른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메이저 대회 파이널 라운드에서 불꽃 샷을 날릴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그가 탄탄한 기본기뿐 아니라 강한 멘탈까지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 아닌가?

무명(無名). 이름이 없다는 뜻이다. 세계 골프의 중심에서 꿈을 품고 시작한 프로 골퍼로서의 삶. 2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는 어떻게 혹독한 외로움과 가난을 견뎌냈을까? 그가 직전까지 투어에서 평생 벌어들인 돈이 이번 대회 우승상금 보다 적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좌절하고 있는 독자라면 더그 배런을 보고 힘을 얻기 바란다.

그는 이번 우승으로 PGA 투어 챔피언스 풀 시드를 받았다. 그의 플레이는 앞으로도 ‘골프채널코리아’가 중계하고 뱁새 김용준 프로가 해설하는 PGA 투어 챔피언스에서 볼 수 있다. 더그 배런은 우승을 확정 짓고 나서도, 또 우승컵을 받을 때도 울지 않았다. 김용준 더골프채널코리아 해설위원(KPGA 프로 & KPGA 경기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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