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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방인 혐오는 ‘작아진 나’의 자기방어
멕시코 장벽·브렉시트…나-他者의 대결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을 실재로 믿어
“지금은 다원화 사회, 돌아갈 길은 없어”
도로상의 탈규제 적용한 ‘만남구역’
교통참여자간 소통·배려…공존 상징


“완전한 소속이라는 생각은 환상이지만, 잘 작동하는 환상이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오늘날 완전한 소속이라는 환상은 이성이나 인식, 통찰이 아니라 단순히 다원화라는 현상에 의해 방해받는다. 수많은 ‘완전한’ 정체성이 나란히 존재하는 다원화가 환상을 방해한다.“(‘나와 타자들’에서)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 마크롱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프랑스, 브렉시트로 혼선을 빚고 있는 영국….

혼란스러워 보이는 세계 정치현상을 놓고 전문가들은 제각각 분석을 내놓고 있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붕괴, 반지성적 흐름 등 다양한 논점에도 하나 같은 얘기는 정치가 예전같이 작동하지 않고, 대중들도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장벽과 난민 혐오나 자국주의로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윤리나 계몽적 시각으로 풀려는 건 중요한 논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카림은 ‘나와 타자들: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민음사)에서 현재의 변화를 제대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전의 과거와 비교해야 한다고 말한다.

카림은 이전의 과거, 즉 민족국가의 형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족국가란 흔히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말한다. 그런데 1983년 베네딕트 앤더슨이 이런 민족의 개념을 흔들어놓았다. 민족은 실재하지 않는 ‘상상된 공동체’란 것이다. ‘상상된 공동체’란 민족이 표상으로, 상상으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민족을 실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게 허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허구임에도 사람들이 믿기에 현실에서 실제로 작동했고, 다양하고 이질적인 대중을 결합시키는 정치서사로 기능해왔다.

저자에 따르면, 상상된 공동체는 민족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들을 잘 알고 있다는 환상 아래서 잘 작동하는데, 언어, 시간, 공간, 상징, 문화라는 동질성이 이런 환상을 부추긴다. 여기에 ‘자기 집’이라는 환상이 더해지면서 퍼즐은 완성된다. 국가가 ‘자기 집’이 된다는 것은 모든 제도와 학교, 법원, 박물관, 정단 등 공공기관이 같은 기초 위에 있다는 의미다. 이는 각 개인에게 온전한 정체성과 의심없는 소속을 보장해준다. 저자는 이 점이 바로 동질사회의 본질이며, 또한 바로 이 지점이 지금 다원화 사회와 대비되는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세계는 불과 20~30년 사이에 민주주의적 국민국가에 동질성을 부여했던 민족이 기능하지 못하면서 동질사회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지금은 다원화 사회다. 이것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뤄진 변화의 본질이라는 게 저자의 통찰이다.

민족의 동질성 밖에 있는 타자, 이방인은 이제 우리 일상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이 이방인들은 ‘그들은 누구인가’만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책은 정체성을 둘러싼 변화과정을 따라가면서 민주주의와 궤를 같이 해온 개인주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살핀다. 개인의 탄생은 19세기 국민국가가 형성되면서다. 기존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하나의 투표권으로 환원된 동등한 개인이 처음 출현했다.

바로 1세대 개인주의다. 2세대 개인주의는 1960년대 정당과 같은 소속을 통한 운동이 개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정체성 정치’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지금 다원화사회에 대두한 3세대 개인주의가 있다. 1세대에선 주체가 다른 존재로 변했고, 2세대에선 주체가 자기 자신을 주장했다면, 3세대에선 주체가 축소된다. 다문화속에서는 ‘당연한’ 게 사라지고, 정상성을 규정했던 남성, 민족, 이성애자 주체가 흔들린다. 타자 혐오는 바로 이 작아진 자아가 취하는 방어태세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우리는 더이상 동질성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고 다원화 사회에 살고 있으며, 돌아갈 길은 없다는 게 현재 우리의 현주소다.

저자는 브렉시트를 ‘민족의 귀환’으로 보는 시각을 부정한다. 이는 모순되게도 민족의 침식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브렉시트 민족 서사는 국민의 50퍼센트에만 적용된다. 나머지 절반은 이를 반대하는 절반만의 민족인 것이다. 여전히 환상이 잘 작동할 때 민족은 밖으로는 경계를 만들고 내부를 결속시켰지만 지금은 내부의 경계로 변한 것이다. 동질이 아닌 분열의 서사가 됐다는 얘기다.

책은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이라든지, ‘좌파 포퓰리즘’ ‘SNS 정치 참여’ ‘혐오 문화’ 등 우리가 경험하는 새로운 정치·사회적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지 명쾌하게 풀어준다.

다원화 사회에서 나와 타자가 공존하는 길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추상적이지 않다.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에서 만날 수 있는 도로상의 ‘만남 구역’이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만남 구역은 엄격한 도로교통법을 적용하는 게 아니라 탈규제를 적용한 역발상이다. 예를 들어 분명하게 편입된 도로 공간을 누락시키는 것이다. 이는 개인에게 불안감을 야기시켜 안전한 운전을 하게 만든다. 도로교통법의 역설적 효과다. 규칙은 위반자를 만들지만 탈규제는 조심하고 서로 소통하며 배려하는 교통참여자를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개인들이 이곳에서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간다.

21세기 다원화된 사회에서 저자가 제시한 개인들이 차이를 나눌 수 있는 상징으로서의 ‘만남 구역’은 다양한 현장에 적용이 가능해보인다. 

이윤미 기자/me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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